조은후 zo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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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미나 / 죽음은 우리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낸다.


2023년 4월 27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마음 챙김의 달인들은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는데 그것은 잘 살기 위해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저기도 거기도 머물지 말고 지금 여기에 있으라. 물론 좋은 얘기이지만 이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잘 살지 못한 인간에 의해 탄생했다고 말이다. 인간이 싫어하고 없애려고 하는 바로 그 흠결이 인간이 가진 감정과 경험 곳곳을 넓히고 들여다보게 해주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냈다고 말이다.

죽음은 우리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낸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만이 그렇다. 소중한 것을 잃고 그것을 결코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들은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어 이곳에도 저곳에도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이곳에도 저곳에도 동시에 존재하며 산다. 그런 점에서 살아있음, 살아남음의 경험은 견딜 수 없이 괴롭다. 죽음은 오토파일럿 하던 삶을 부수고 감당할 수 없을 듯한 진실을 눈앞에 들이대며 위협한다.

『어쩔 수 없음들과의 여정』에는 두 가지의 핵심적인 죽음이 등장한다. 32년 전 27세의 나이에 데이트폭력 피해자로 살해당한 이모의 죽음과 친구의 자살이 그것이다. 두 죽음이 갖는 맥락을 이해하자면 다소 재미없는 통계 수치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2020년 「경찰청범죄통계」에 따르면 전체 강력범죄(살인, 강도, 성폭력, 방화) 피해자 24,332명 중 남성이 2,821명, 여성은 21,006명, 성별불상이 505명으로 성별 불상을 제외하고 피해자의 88.2%가 여성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공개한 범죄동향 이슈통계는 2005년 이후 10년간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80% 안팎을 유지해왔음을, 2010년 이후 이 비율은 전체 강력범죄 건수의 증가와 함께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같은 통계에서 전체 강력범죄를 범행한 범죄자의 성비는 전체 26,971명 중 남성이 25,628명, 여성이 1,343명으로 범죄자의 95%가 남성이다.

여성 살해, 곧 페미사이드는 10명 중 9명이 아는 사람에 의해 벌어진다. 영국에서 10년간 조사한 ‘페미사이드 센서스’에 따르면, 전체 살해당한 여성 1,435명 중 범죄자가 낯선 사람인 경우는 119명으로 8%에 불과하다. 남편(372건), 연인(303건), 전 연인(167건), 전남편(32건) 등 페미사이드로 희생된 여성의 62%(888건)는 친밀한 관계에 있던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한겨레21의 분석에 따르면 2016년 1월부터 2021년 11월 1심 선고된 페미사이드 관련 판결문 427건 중 93%(397명)가 아는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여성 살해는 여성 스스로에 의해서도 벌어진다. 여러 매체에서 이미 보고된 바 있듯이 한국 20대 여성의 자살률은 최근 급증했다. 통계청의 「2020년 사망 원인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이래 전체 자살 사망자는 감소하는 추세에서, 20대 여성 자살은 2015년에 비해 64.5%가 증가했고. 모든 연령대의 남녀를 통틀어 20대 여성의 자살 증가율이 가장 높다.

오늘날 한국 젊은 여성의 자살률은 다른 세대 여성의 젊은 시절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높다. 2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로 다른 세대에 비해 생애 내내 높은 자살사망률을 보였던 일본 전후세대처럼 특정한 행동양식을 공유하는 인구집단을 코호트 효과라고 부른다. 장숙랑 중앙대 간호대 교수는 2019년 발표한 연구 「청년 여성의 자살 문제」에서 한국에서는 20, 30대 청년들에게 출생 코호트 효과가 있다고 말하면서 1950년생 여성보다 1980년생의 자살사망률이 약 5배, 1990년생은 약 7배 높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렇게 생산된 숫자들은 왜 자꾸만 보이지 않게 되는가? 숫자들을 구구절절 갖다 붙이는 이유는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죽음, 죽음에의 공포가 실재하는 진실임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성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강력범죄, 여성 대상 살해는 “여성 대상 살해(페미사이드)”라고 이름 붙여지지도 않는다. 죽은 여자들은 이름 없는 존재로 남으며, 죽음에의 공포를 호소하는 여성은 망상에 시달리는 미친 사람이 된다. 그렇게 죽음이 무화 될 때 그 죽음은 애도 되지 못하고 시간 안에 멈춰버린다.

전시 《어쩔 수 없음들과의 여정》은 애도되지 못한 것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우는 의식이다. 속삭이는 말, 가만한 대화로 시작하는 영상은 내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작가는 새장에서 지저귀는 아름다운 새 대신 고층 유리 건물에 부딪혀 추락사한 새들을 그린다. 이것이 축제처럼 느껴진다. 맑고 깨끗하며 매끈한 것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을 깨부수는,
더러움,
슬픔,
시궁창,
차가움,
상한 것,
쓰레기,
그림자,
누름돌,
묫자리 없는 죽음,
불운한 것들,
불길한 것들,
억울함 (그래, 억울함!),
혐오스러움,
그리고 어쩔 수 없음,
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 조은후는 말하는 듯하다. 이쪽이 진실이라고, 진실한 창조라고.
죽음은 한쪽 문을 닫고 다른 쪽 문을 연다. 세상의 끝을 마주하고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한다. 잃은 뒤에 얻게 한다. 이 전시가 보여주는 것을 끝이 만들어 낸 시작, 죽음이 선사한 자비라고 부르고 싶다.


하미나(작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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